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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 라이프]제 4기 창조경영 최고경영자과정 일본 워크숍, 나가사키를 통해 보는 일본의 근대화 코드

December.2013 No Comment

11월 8일부터 10일까지, 문화기술대학원 창조경영 최고경영자과정 원우들은 일본 규슈(九州) 지방의 나가사키(長崎)로 해외 워크숍을 다녀왔다. 이번 해외 워크숍은 ‘일본 근대화 코드: 나가사키’라는 주제 아래 일본 최초의 개항지이자 근대화의 상징적인 도시인 나가사키를 살펴보며 일본의 근대화가 형성된 모습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첫째 날. 일본 문화 이해하기

11월 8일 아침, 원우 일행은 이른 시간부터 공항에 집결해 후쿠오카(福岡)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2박 3일의 길지 않은 일정, 한 시간 이십분 짧은 비행 끝에 도착한 후쿠오카 국제공항 근처에서 간단히 점심식사를 마친 후 일행은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첫 번째 여정지, 다케오(武雄)로 향했다. 다케오는 사방을 에워싼 산 가운데 자리잡은 고요한 온천마을이다. 조용한 마을, 다케오를 둘러보며 미후네야마(御船山) 기슭의 게이슈엔(慧州園)을 찾았다. 작은 연못 너머의 녹차밭과 어우러진 일본식 정원의 풍경을 감상하며 차 한잔을 마신 일행은 근처의 또 다른 정원, 라쿠엔(樂園)으로 발길을 돌렸다. 상당히 현대에 조성된 게이슈엔과는 달리 라쿠엔은 1845년, 다케오의 28대 영주였던 나베시마 시게요시(鍋島茂義)가 별장을 짓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깎아지른 산봉우리 아래 자리잡은 공원은 약 60만 제곱 미터(약 15만평)의 광대한 넓이에 철쭉, 벚꽃, 단풍, 동백 등의 나무들이 사계절 내내 다채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 공원의 조성을 위해서 시게요시는 화가에게 먼저 완성도를 그리게 한 후 그대로 공원을 만들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림 같다’라는 찬사가 딱 어울리는 공간인 것이다. 게이슈엔과 라쿠엔 모두, 인공적인 조형을 절제하고 조화를 강조하는 우리나라의 정원에 익숙해진 눈에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지는 몰라도, 물, 돌, 나무 등 자연의 구성물들을 재조성하여 극단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치밀한 조경을 선호하는 일본식 정원의 특징을 아주 잘 드러내는 장소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원 관람을 마친 일동은 다케오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또 다른 온천마을, 우레시노(嬉野)마을의 한 료칸(旅館, 일본 전통식 숙소)의 전통식 방에 짐을 풀었다. 일본식 실내복인 유카타(浴衣)로 갈아입고 유명하다는 유황온천에서 목욕을 하니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여정 때문에 쌓인 여독이 말끔히 가시는 듯 했다. 첫날의 저녁으로 화려한 전통식 연회요리, 가이세키(會席) 요리가 준비되었다. 수 많은 재료로 만든 여러 가지 요리들을 맛 볼 수 있었던 가이세키 요리는 마치 오후에 둘러보았던 정원들을 연상케 할 정도로 아기자기하고 화려한 모습이었다. 단 하루의 일정으로 일본의 문화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무리가 있겠지만, 정원, 음식, 의복 등 일본의 전통 문화를 체험해 봄으로써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떤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던 하루였다.

<유카타를 입고 가이세키 요리를 맛보고 있다.>

 

둘째 날. 나가사키를 통해 보는 근대화의 자취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 본격적인 여정을 위해 나가사키로 향했다. 숙소에서 나가사키로 가는 1시간 30분 남짓의 시간 동안 동행한 가이드 선생님께서 일본에서의 근대화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1543년 포르투갈 배가 규슈 남단의 타네가시마섬(種子島)에 표류되며 처음 총기가 전래된 이후, 1549년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co de Xavier)가 탄 배가 규슈에 들어오며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의 최고 실력자였던 오다 노부나가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였고, 1571년 막부는 히라도(平戶)에 이어 나가사키에 포르투갈 상관을 설치하였고, 나가사키는 본격적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과 무역을 시작하며 전에 없던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쇄국정책의 뒤를 이어 에도(江戸, 현재의 도쿄)막부 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서양과의 무역에 나섰다. 일본에 표류한 외국인인 윌리엄 애덤스와 얀 요스텐을 직접 에도로 불러들여 외교고문으로 삼아 영국과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관장하게 하기도 했다. 서방세계와의 교류가 점차 활발해지자, 일본 내에서는 인간평등사상을 주창하는 기독교 신자들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했으며 무역 이익을 등에 업은 부유한 다이묘(大名)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집권기에 기독교를 금지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해외무역을 통한 이익 때문에 기독교도의 활동을 묵인하여 왔으나 결국 이러한 상황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곧 에도 막부는 기독교를 탄압하고 무역선을 추방하는 등의 쇄국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결국 일본의 서방 외교는 포교활동을 하지 않는 조건을 내건 네덜란드와의 교역으로 국한되었고, 나가사키는 쇄국정책이 이어진 1858년까지 서방세계로 통하는 일본의 유일한 창구가 되었다.

일본은 1858년 미국의 요구에 의해 오랜 쇄국정책을 철회한 이후, 1868년부터 시작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통해 통일국가를 형성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빠른 속도로 근대화된 입헌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영향력은 한층 더 강해졌으며, 국내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아시아 최고의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23년의 간토(関東)대지진과 1929년의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일본에는 불황이 찾아왔고, 경제적 불황으로 인해 극우 군부세력들이 암살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는 등 정치적 상황도 혼란스러워져 갔다. 유럽에서는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이 위기 극복을 위해 일본은 아시아를 식민지로 차지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며, 따라서 이 지역을 식민지로 가지고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와 반대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중국을 상대로 오랫동안 싸우던 일본은 눈을 돌려 자원이 풍부한 인도차이나 반도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곳에 식민지를 가진 미국,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는 반발하였고 일본의 물자 공급을 모두 끊어 버렸다. ‘ABCD(America, Britain, China, Dutch) 포위 작전’이라고 부르는 이 작전으로 일본으로 들어가는 자원의 공급이 모두 끊기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은 1941년 겨울,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다. 이 사건은 국제 정세에서 한발 물러나 있던 미국을 참전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개전한 이후 일본은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일대를 석권하지만, 결국 양면에 중국과 미국이라는 적을 두고 싸워야 했던 일본은 패전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1945년 일본 본토에도 미국의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전쟁에 지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고,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했다. 마침내 그 해 8월 15일, 일본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전쟁은 끝을 맺게 되었다.

<나가사키 원자폭탄자료관 앞에서>

 

둘째 날 첫 번째 방문지는 일본 근대역사 중 가장 최근 사건 인 ‘나가사키 원폭’의 참상을 알기 위해 원자폭탄자료관을 찾았다. 세계대전 당시, 나가사키는 일본 본토 남쪽에 있는 가장 큰 항구 도시 중 하나였고 군수품, 선박, 무기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대규모 산업 시설을 가지고 있는 도시였다. 시민들 대부분이 공장 근처에 살고 있었고, 따라서 원폭 투하 직후 민간인들의 피해를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22만명의 인구 중 8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하고, 7만명이 부상을 입었을 정도로 피해 규모가 컸다고 한다. 이 곳에는 원폭이 가져온 피해의 참상들이 보존되어 있다. 원폭 당시의 시간에 멈춰있는 벽시계와 무너진 우라카미(浦上)성당의 벽면, 고열로 눌어붙은 그릇 등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알려주는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실 곳곳에 있는 스크린에서는 원폭 직후 피해자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알리고 있었다.

<나가사키에 투하된 4.5톤의 중량을 가진 핵폭탄, ‘팻 맨(Fat man)’의 모형>

 

나가사키 원자폭탄자료관을 나서니 나가사키 평화공원으로 연결되었다. 평화공원은 원폭이 떨어진 장소에 당시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로 만들어진 작은 공원이다. 공원에 들어선 일행을 처음 맞이한 것은 분수대였는데, 온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속에서 물 한모금을 부르짖던 피해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고 한다. 공원의 이름에 걸맞게 평화로운 분위기의 공원이었지만, 곳곳에 세워진 당시 피해자들의 모습을 모티브로 한 듯한 조형물들과, 수천마리의 종이학으로 둘러쌓인 추모비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한층 가라앉는 듯 했다. 공원 구석에는 당시 징용되어 피해를 입은 1만여명의 조선인 피해자를 위한 추모기념비 역시 찾을 수 있었다.

아쉬웠던 점은, 평화공원과 원자폭탄자료관 모두 원폭이 가져다주는 끔찍한 결과에 대해서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을지언정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아시아에 침략 전쟁을 일으킨 가해자로서의 반성의 모습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같은 전범국가인 독일이 베를린에 자신들의 과오의 인정과 반성을 담은 유대인 박물관(Jüdisches Museum)을 만들어 그들의 치부라고 할 수 있는 과거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과는 사뭇 비교가 되는 듯 했다. 일본의 수 많은 민간인 피해자들이 입은 상처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결국 이 모든 피해 역시 제국주의의 광기에 물들어 있던 일본이 자초한 결과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아시아 식민지들에 끼친 피해를 포함해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의 느낌이 없어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나가사키의 명물이자 일본의 3대 차이나타운중 하나라는 신치 추카가이(新地中華街)를 찾아 점심을 먹은 뒤 데지마 섬으로 항했다.

한 때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를 비롯해 영국, 스페인, 멕시코, 필리핀등의 국가들과 실시해오던 일본의 무역은 쇄국정책이 실시된 이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를 대상으로만 국한되었다. 부채꼴 모양의 인공 섬인 데지마섬은 쇄국정책이 진행중이던 1636년, 히라도와 나가사키에서 무역을 하던 포르투갈인들을 격리하여 수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불과 1년이 지난 1637년, 막부의 탄압에 고통을 겪던 기독교인들이 나가사키에서 반란(시마바라의 난)을 일으키자, 막부는 결국 포르투갈인들마저 배후로 지목해 추방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추방당한 이후 막부는 포교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네덜란드 상관을 히라도에서 이 곳으로 옮겨 왔고, 데지마는 쇄국 정책이 실시된 200여년의 시간 동안 일본의 유일한 개항지가 되었다.

한때는 항만개량공사에 의해 섬 자체가 없어졌지만 1996년부터 나가사키시에서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건물들의 외관뿐만 아니라 내부 역시 사료관으로 구성하여 복원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무역상들의 식사, 가구 등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았는데 다다미가 깔린 전통식 주택 위에 침대, 식탁 등의 서양식 가구로 방을 꾸며놓은 모습이 이채롭게 느껴졌다.

< 데지마에서 당시의 복장을 입은 직원과 함께 >

 

다음 목적지인 구라바엔(グラバー園 / Glover Garden)으로 올가가는 길목에는 오우라텐슈도(大浦天主堂)라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 있다. 이 곳의 정식 명칭은 ‘일본 26인 성인 순교자 천주당’으로, 니시자카에서 처형된 26인의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1864년 프랑스 신부가 지었다고 전해지며 오늘날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 오우라텐슈도의 모습 >

 

오우라텐슈도를 지나 유럽풍의 건물들과 아기자기한 상점들로 둘러싸여 눈을 즐겁게 하는 구라바엔 입구의 언덕길, 구라바도리(グラバー通り)를 오르면 다음 목적지인 구라바엔이 등장한다. 구라바엔은 일본에 최초로 증기기관을 들여왔으며, 막부시대 말기에 유신지사들을 후원하는 등 역사적인 면에 있어서도 일본의 근대화에 많은 역할을 한 영국 상인인 토마스 글로버(Thomas Blake Glover)가 살던 저택이 있었던 곳이다. 또한 오페라, 나비부인(Madama Butterfly)의 무대로 유명한데, 바로 이 곳의 주인이었던 토마스 글로버가 혼인한 일본 여인이 오페라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둘째날 마지막 행선지는 나가사키 26성인 순교지였다. 1587년, 나가사키를 거점으로 세력을 키워나가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규모에 위협을 느낀 당시의 집권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금교령을 내리게 되었다. 10년이 지난 1597년 2월 5일, 외국인 신부 6명을 포함한 천주교 신자 26인을 이 곳으로 끌고와 처형하게 했다. 이후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이 곳에 공원이 들어섰다고 한다. 순교지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십자가에 26성인의 모습을 부조로 조각한 기념비였다. 기념비 뒤에는 1962년 건립된 기념관이 있어 매년 2월 5일이면 추모미사가 거행된다고 한다.

<니시자카마치, 26인 순교자 기념비>

 

셋째 날. 일본의 도자기 문화

짧은 워크숍 일정이니만큼, 마지막 날 역시 바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1854년, 일본이 문호를 개방한 이후, 서구인들은 점차 그들에게는 생소했던 일본 미술을 접하기 시작했다. 특히 1862년 런던 만국박람회와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통해 일본의 도자기, 차, 부채, 우키요에(浮世繪, 목판 풍속화) 등이 유럽에 소개되면서 일본의 문화 및 예술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고, 프랑스의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그 양식과 기법을 차용하는 것이 유행이 되는 등 일본 문화의 유입은 ‘자포니즘(Japonisme)’이라고 불리우는 흐름이 되어 유럽의 예술사조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우키요에와 함께 자포니즘의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이 바로 도자기인데,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이나 스페인 마드리드의 왕궁에서도 일본산 도자기가 사용되거나 전시된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을 정도이다.

마지막날의 첫 일정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도자기 생산지, 이마리(伊万里)를 찾는 것이었다. 이 곳은 임진왜란때 많은 조선의 도공들이 끌려와 자리를 잡은 장소이기도 하다. 이 곳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는 그 자체가 ‘이마리’라는 하나의 브랜드네임으로 불리우며 일본산 도자기 중 가장 고급의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개항 당시에도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그 화려함 때문에 궁전을 장식하는 요소로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도자기로 유명한 도시답게 도시 곳곳의 표지판과 안내문이 자기로 꾸며진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마리를 떠나 국립 규슈박물관 관람을 마지막으로 2박3일간의 일정은 끝이 났다.

<규슈국립박물관>

 

일본 근대화 과정을 짚어보고자 출발한 나가사키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이 근대화에 성공한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가 임진왜란을 겪기 이전부터 유럽과 교역하며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여, 미국식 평등을 중시하는 사고를 가진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유럽식 차이를 인정하는 사고를 가졌다’라는 역사적 차이에서 비롯된 문화적 차이를 깨닫게 된 여행이었다.

흔히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불리는 일본, 동행한 최고경영자 과정 원우들 역시 이번 여행을 통해, 이 나라의 문화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란다. <끝>

 

전지민 기자 / jimin.jeon@ka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