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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 Opinion] 3.1운동 100주년,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은 모두가 동일하지 아니한가. 여성 독립운동가, 그들을 살펴보다.

March.2019 No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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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http://www.kyungginews.com/news/article.html?no=67801

1919년 3.1운동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하나의 일념으로 똘똘 뭉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다. 독립운동의 3대 원칙으로 다음의 세 가지가 제시되었다. 대중화할 것, 일원화할 것, 비폭력적으로 할 것.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모였고, 신분이나 직업의 귀천 또한 없었다. 국내 뿐 만 아니라 한인이 사는 곳이면 만주, 미국, 일본, 연해주 등 해외 어느 곳이든지 하나가 되어 독립 운동을 벌였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 선생의 주체로 3.1운동이 형성된 이후엔 기독교, 불교, 유림 등의 교단이 총망라 되었으니 종교를 초월한 독립 운동이기도 하였다. 이는 후대에 와서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한국 민족주의의 특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3.1운동은 노장년층의 1, 2 세대가 지도층을 맡고, 3세대인 청년이나 학생들이 만세 시위의 선봉에 섰던 운동으로써 1, 2 세대의 축적된 독립운동 역량과 계승이 3세대의 새로운 활력과 뭉치면서 민족 역량이 총 결집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3.1 운동에서 여성의 참여는 근현대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집밖 출입조차 제한되었던 여성들의 참여는 전통 사회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3.1 운동은 독립운동 그 자체로서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지만, 우리 나라 역사에서 여성의 인권 신장에 한 획을 그었던 사건이라 평가할 수 있다. 3.1운동 직후 남성들의 독립 단체와 별개로 여성의 독립운동단체가 방방곡곡에서 생겨났으며, 여성은 자기 스스로 남성을 돕는 위치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주체라고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초안한 ‘헌법’에 보통선거권을 여성에게 부여하였다. 영국 1927년, 프랑스 1946년, 스위스 1971년, 포르투칼 1974년에 여성 참정권을 보장했던 것에 비교하면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관련 링크> 1919년, 임시정부는 여성보통권을 인정했다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외부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된다.”
1918년 1월 8일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다. 이는 전 세계의 수많은 피압박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5.4운동이, 인도는 마하트마 간디가 이끄는 저항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었던 영국, 프랑스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강력히 반발하자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고,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었다. 이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핀란드 등은 독립국이 되지만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해당사항’이 없었다.

1919년 2월 8일 한인 유학생 400여명은 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였다. 최팔용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자 백관수가 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 모임은 곧 일본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지만 20여일 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는 매개체가 된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한용운은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의연하게 일본 경찰에게 연행되었다. 이 시각 탑골공원에 모여든 중등학생 4,000~5,000명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종로 쪽으로 뛰쳐나와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행렬은 대한문에 이르러 고종황제 빈전(殯殿)을 향해 삼례(三禮)를 올리게 된다.

<관련 링크> 3.1운동

 

유관순 열사,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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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7706409&memberNo=18873078(좌)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76394.html(우)

서울에서 있었던 최초의 3.1운동이 일제의 탄압을 받고, 3월 10일까지 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화학당을 같이 다니던 사촌 언니 유예도 열사와 함께 천안으로 내려가 교회, 학교, 유림 대표 사람들을 만나 만세운동 취지를 설명하고 설득하면서 후일을 도모하였다. 주민들을 결집하여 자체적으로 항의 시위를 주도할 것을 독려했다. 양력 4월 1일이 되던 날 (음력 3월 1일), 유관순은 아우내장터에서 3,000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만세 운동을 벌였다. 집에서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나눠주며 독립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 일제 헌병대가 사람들을 겨냥해 총을 쏘았고 19명이 사망했다. 유관순의 부모도 이 날 사망했다.

당시 인구 2천만여 중 약 2백만명이 독립 운동에 참여하였고, 일본 정부는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을 빌미로 70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유관순을 포함해 약 4만 6000명은 투옥되었다. 선동죄로 유죄 선고를 받은 유관순은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유관순은 서대문 형무소에 있으면서도 다른 수감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대한민국 독립을 촉구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지속적으로 표명했다. 더불어 투옥 중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대규모 시위를 준비했다. 유관순은 독립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는 이유로 결국 지하 독방으로 이송되었고, 반복적인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1920년 9월 28일 17세 나이로 사망하기 전 유관순은 “일본은 패망할 것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관련 링크>유관순 열사

 

김마리아 열사, “너희가 할 대로 다 해라, 그러나 내 속에 품은 내 민족 내 나라 사랑하는 이 생명만은 너희가 못 빼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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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https://www.huffingtonpost.kr/2015/02/27/story_n_6764086.html

김마리아의 항일투쟁은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김 열사는 24살 되던 1915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도쿄조시가쿠인(東京女子學院) 학교를 다녔다. 본과(중등교육과정)에서 1년, 고등과(전문학교 과정) 3년을 수학한 김마리아는 유학생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도쿄로 건너간 이듬해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이 되었다. 그때 도쿄의 여자 유학생 수는 40여 명이었다. 조선인 유학생 350명 중 약 10%에 지나지 않았지만, 최상층의 여성 지식인 집단이었기에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굉장히 컸다. 김마리아 회장은 기관지 <여자계> 발간에 힘썼다. 이 잡지는 남녀 학생을 망라한 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 <학지광>과 함께 유학생 사회의 여론을 이끌었다.

1919년 2월 8일 일본유학생들과 독립선언 결의문을 채택한 김마리아는 일본 정부에 끌려가 여러 시간 취조를 받고 풀려났다. 졸업을 한 달여 앞둔 시점에 정신여학교 루이스 교장의 귀국 종용 편지를 받은 김마리아는 기모노 속에 28 독립선언서 복사본 10여장을 숨기고 귀국하여 동경유학생들의 독립 운동을 국내에 알리게 된다. 이는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또한 그는 3·1운동의 소용돌이에서 여학생 조직화에 노력했다. 도쿄여자유학생 그룹과 이화학당 그룹을 묶고, 서울 시내 각 여학교 대표자들의 연합 기구를 조직하려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 비밀이 탄로나면서 3월6일 체포되었고, 김마리아는 폭력과 수모를 온전히 견뎌야 했다. 5개월간의 옥고 끝에 석방되었지만 고문 후유증은 평생동안 그를 괴롭혔다. 출소 한 달 만에 당시 최대 여성 비밀 항일 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고,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아 보내는 등 독립 운동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는 재미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인 근화회를 창설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김 열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생긴, 뼛속에 고름이 생기는 지병으로 해방 1년 전 순국했다.

<관련 링크> 참혹한 고문 이겨낸 조선의 혁명 여걸

 

권기옥 지사, “나는 비행기 타는 공부를 하여 폭탄을 안고 일본으로 날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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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http://theme.archives.go.kr/next/pages/new_newsletter/2016/02/sub03_1.html

권기옥은 한국인 최초의 여성 비행사다. 그는 10여년간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며 대위 계급까지 진급하였다. 군관을 양성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추천으로 운남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였고, 수년간의 훈련을 받으면서 조종술에 비상한 능력을 보였다. 숭의여학교 재학 시절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교 선생님과 함께 거리로 나가 만세운동을 하였고, 이 때문에 평양경찰서에 감금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 후 독립 자금을 모금하고 공채를 판매하며 그 자금을 임시 정부에 송금하는 활동을 하였고, 평안남도 도청 폭파사건에 가담하기도 하였으며 평양청년회 여성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 청년들과 교류하면서 자신만의 독립 활동을 이어나갔다. 결국 이러한 여러 활동으로 일본 경찰들의 감시가 심해져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권기옥은 멸치잡이 배를 타고 1920년 상해로 망명한다.

애초 항공대 창설을 구상했던 임시정부에 여력이 없어지자 권기옥은 중국 공군으로 투신한다. 1926년 2월 여운형을 만나 국민군 항공대 소좌를 소개받은 뒤 국민군에 합류하였으며 1932년 상해전쟁 때 정찰기를 몰고 출격한 권 지사는 일본 지상군에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전쟁 뒤엔 무공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망명하였다는 사실이 일본에 알려지면서 권 지사는 일본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암살 시도를 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충칭에서 좌우로 분열된 부인들을 단합해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1949년 서울로 돌아온다. 해방을 맞고 나서는 공군 창설에 기여하여 현재 ‘대한민국 공군의 어머니’로 불리고 있으며 한국 전쟁 시기에는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전문위원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관련 링크> 독립운동 강철날개, 권기옥
권기옥, 애국지사의 푸른 꿈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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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5761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올 해는 사회 전반에 걸쳐, 특히 문화 예술계에서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3.1만세운동 후 서대문 옥사에 갇힌 뒤 1년여 동안의 시간을 그린 유관순 열사와 여옥사 8호실 이야기 <항거: 유관순 이야기> 가 가장 대표적이다. 이 뿐 만 아니라 간송미술관의 ‘대한콜랙숀’, 문화재청이 준비한 ‘문화재에 깃든 100년 전 그날’, 그리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최근 개막한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조선총독부 판결문, 독립선언서’, 국립여성사전시관 ‘여성독립운동가, 미래를 여는 100년의 기억’까지 잊지 말아야할 선조들의 정신과 흔적을 기록한 자료들이 100주년에 맞춰 3월 부터 전시된다. 또한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올 해 2019년 100주년에 맞춰 2016년부터 일제강점기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판결문과 수형기록카드를 정리한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편)]을 단계적으로 발간하고 있다.

그동안 남성독립운동가에 비해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부족한 자료 수집과 발굴을 꼽는다. 여성들이 독립유공자 포상에서도 대체로 낮은 훈격을 받았으며 이에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국가보훈처에 기록된 독립운동 참여자 10만여 명 중 여성 독립운동 참여자는 2%에 해당하는 약 2000명 정도다. 2015년 8월 15일 기준 ‘여성 독립유공자 포상 현황’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포상받은 여성 독립유공자는 265명으로, 전체 포상자 1만4197명 중 약 1.86%에 불과하다.

독립운동 참여자 발굴과 포상을 위해서는 행형 기록인 판결문, 형사 사건부, 범죄인명부, 형사공소사건부, 신문 자료 등 활동 당시의 기록이 필요하다. 그러나 유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증 자료 미미와 기준 미달, 행적 미상 등의 이유로 포함되지 못한 여성들이 여전히 많다. 김정아 국가보훈처 전문관은 “독립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한 여성이 많지만,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서 포상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기본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포상 기준은 똑같지만, 여성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기록이 없어 입증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강영심 이화여대 사학과 연구교수는 “여성 독립운동가를 연구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며 “굉장히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고, 전문적인 연구자가 참여해야 한다고 밝힌다.

위에 언급한 유관순 열사, 김마리아 열사, 권기옥 지사 이외에도 사형 구형을 받은 아들에게 수의(壽衣)와 함께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마라’는 편지를 보낸 조마리아 선생, 독립운동은 물론이고,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권 신장에도 힘을 기울인 남자현 의사,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의사, 간우회(간호사들의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남편 신채호 선생과 함께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의거를 비밀리에 도운 박자혜 지사, 민족주의 여성단체 근우회에서 활동하고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는데 참여했던 박차정 의사, 여성독립운동 뿐만 아니라 여권신장운동의 신기원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까지. 여성 독립운동가 대명사로 불리는 ‘유관순 열사’를 제외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존재와 활동은, 늦었지만 지금에서야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찾아지고 더 많이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남녀고용평등법, 호주제폐지운동, 민주화운동 등 성평등과 같은 인권 아젠다 속에서 여성 독립운동가를 비춰보게 된다. 국립여성사전시관 기계형 관장은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가 특별한 이유는 “여성들이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닌 능동적인 행위 주체로 등장한 점”을 꼽았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교육에 뛰어들고, 총칼을 들었으며 위험 인물을 직접 처단하기도 하였다는 의미다. 특히 “19~20세기 애국계몽운동을 비롯해 국채보상운동, 의병운동, 만세운동 등을 보면 여성들, 특히 젊은 여학생들이 정치세력으로 등장했음이 확인된다. 근현대 100년은 5000년 한국 여성사 중에서도 특히 자부심이 드는 시대”라고도 밝혔다. 또한 기 관장은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이 10대, 20대 젊은 청년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들은 이미 ‘내가 국민이다.’라는 자의식이 분명했음을 설명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독립운동의 이미지는 옥사 혹은 즉시 처형처럼 엄청난 영웅적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수 많은 여성독립운동가가 전투나 암살 같은 영웅적, 군사적 행위에 초점이 맞취진 독립운동 개념과 범위 밖에서 정의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더라도, 한 뜻으로 나라의 독립을 염원했고, 뒤에서 돕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다만 그 중 대다수의 여성독립운동가가 독립군 군자금 조달이나 독립운동을 알리는 라디오 방송, 그리고 임시정부 가계를 운영하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아직 기록되지 않은 여성독립운동사는 이러한 ‘반쪽 독립운동사’의 공백을 채워준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관련 링크>국가기록원, 여성독립운동자료집 첫 발간
여성독립운동가, 영웅이라 불리는데 70년
한국 여성운동 원천은 1세기 전 독립운동 참여한 여성들

다음은 3.1 독립선언서의 첫 두 구절이다. 우리 모두 그 날의 의미를 독립선언서를 통독하며 되새기길 바란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朝鮮(아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려 인류 평등에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에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정 지 현 jh.joung@kaist.ac.kr